이인이 Lee ine
손암 정약전 (丁若銓 )












손암 정약전 (丁若銓 )
실학자 생물학자
( 1758년 4월 8일 ~ 1816년 6월 30일)
조선 후기의 문관, 실학자, 저술가, 생물학자
본관은 나주, 자는 천전(天全), 호는 손암(巽庵)
일성(一星), 매심(每心)
정약현(丁若鉉)의 동생이며, 정약종, 정약용의 형이다.
흑산도 연해의 어류 생태계를 연구, 기록한 실학서 《자산어보》의 저자이다.
1758년(영조 34년) 양력 3월 1일, 경기도 광주부 마재(또는 마현(馬峴),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정재원의 두 번째 부인인 윤소온(尹小溫)으로 해남 윤씨 가문에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5대손이다.[2] 외조부는 윤덕렬이고 외증조부는 윤두서이다.
어머니가 아들 셋을 얻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아명(兒名)을 삼웅(三雄)이라 하였다.
정약현은 이복형, 정약종과 정약용은 동복동생이다.
1776년(영조 52년) 아버지 정재원이 호조좌랑에 오르면서 서울로 왔다.
성호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권철신문하에서 수학하며, 이윤하, 이승훈, 김원성 등과 교유했고, 이들을 통해 서양의 학문과 사상을 접했다.
1779년(정조 3년) 스승 권철신이 여주 주어사(走魚寺)에서 연 강학회에서 이벽 등과 함께 천주교 교리를 토론하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1783년(정조 7년) 사마시(소과)에 합격했다.
1784년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온 이승훈의 주도로 김범우의 집에 세운 조선 최초의 천주교회에서 동생 약종과 약용, 이벽 등과 함께 주일 미사와 강론 등 천주교 종교 활동을 했고, 가성직제도 하에서 사제직까지 수행하면서 초기 천주교 전파의 핵심적 역할을 했다.
시기에 동생들은 세례를 받았지만, 정약전은 베이징에 가서 받을 생각으로 받지 않았다.
이 활동은 1785년 4월, 형조(刑曹)에 적발되었지만, 김범우 이외의 교인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1790년(정조 14년) 증광별시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와 병조좌랑(정6품)을 지냈다.
1798년(정조 22년), 정조의 명으로 경기도 출신 인물들을 평한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편찬에 참여했다.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전라도 신지도에 유배되었다가, 조카사위인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흑산도로 이배되었다.
유배 생활을 하며 서당을 지어 섬 아이들을 가르쳤고, 흑산도 연해에 서식하는 어류를 직접 관찰하고
연구하여 쓴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전문서 《자산어보》, 조선 조정의 소나무 정책을 비판한 《송전사의》, 흑산도 홍어 상인 문순득의 표류기인 《표해시부》 등을 남겼다.[6]
1817년(순조 16년), 유배 16년 만에 내흑산 우이도(牛耳島)에서 6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자산어보(玆山魚譜)》 : 조선 지역의 해양생물학 전문서
《송정사의(松政私議)》 : 조선 조정의 소나무 관련 정책에 대한 비판문
《표해시말(漂海始末)》 : 어물 장수 문순득의 표류기
< 자산어보 > ( 玆山魚譜)
조선시대 영조-순조 당시 학자인 정약전이 1801년(순조 원년)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박해 때 전라도 흑산도에 유배되어
1814년(순조14년)까지 생활하면서 이 지역의 해상 생물에 대해서 분석하여 편찬한 해양생물학 서적이다.
총 3권으로 이뤄져 있으며 원본은 없고 필사본만 남아 있다. 흑산도 근해의 각종 어류와 수중 식물을 인류(鱗類 : 비늘이 있음)와 무린류(無鱗類 : 비늘이 없음), 개류(介類 : 딱딱한 껍질을 가짐), 잡류(雜類 : 물고기가 아니지만 물에 사는 생물)로 분류하여 총 155종의 생물을 설명했다.
그 중 잡류는 해충(海蟲 : 바다 벌레), 해금(海禽 : 바다 새), 해수(海獸 : 바다 짐승), 해초(海草 : 바다 풀)로 다시 나뉜다.
이러한 분류 방식은 당시까지 동양 최고의 박물지인 이시진의 《본초강목》과 비교했을 때, 새로운 생물군을 찾아내고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누었다는 점에서 우수했다.
자산어보에는 여러 해양 동식물들의 이름, 모양, 크기, 습성, 맛, 쓰임새, 분포 등을 자세히 기록했다.
수록된 생물 가운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은 것도 있으며 무린류 가운데에는 인어(人魚)가 나오기도 한다.
자산어보에는 청안(𤲟案)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는 \'청안이란 단어의 뒷부분에 나오는 내용은 정약용의 제자인 이청이 내용을 보충하였다 \'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청이 스스로 후대에 보충하여 쓴 것인지 아니면 정약전이 정약용의 제자인 이청으로부터 내용을 전해 받은 다음 쓴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과학사학자 신동원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으로 쓰인 옥편들인 《강희자전》과 《규장전운》에서는 자(玆)가 \'현 \'으로 읽히는 용례가 없으며,
\'현산어보 '라는 주장의 주된 근거가 되는 동생 정약용의 玆山에 대한 언급은 단지 자(玆)가 검다(黑)는 의미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만약 본래 음과 다른 음으로 쓰였다면 별도의 뜻풀이를 했어야 하지만, 정약용과 정약전의 글에서는 그런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또한 자산어보의 \'자산(玆山 \'이 흑산도라는 주장에 대해서, 흑산도의 의미도 갖지만 실은 정약전의 호인 자산에서 딴 것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흑산도만을 뜻했다면, 그의 또 다른 저서인 《자산역간(玆山易諫)》은 \'흑산도의 역간 이라는 뜻이 되므로 맞지 않다는 것이다.
정약전은 형제들 가운데서도 4살 아래 동생인 정약용과 우애가 깊었다. 정약용도 둘째 형인 정약전을 어린 시절부터 잘 따랐고, 유배 생활 중에도
그에게 심적으로 많이 의지하며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래서인지 정약용의 글에서도 정약전에 대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두 형제는 젊은 시절 함께 동림사, 봉은사에서 수학하며 학문의 즐거움과 형제들간의 우애를 논하기도 했으며 정약전이 본래 벼슬길인 대과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정약용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하여 벼슬길에 나서기도 했다. 정조 역시 “정약전의 준걸한 풍채가 정약용의 아름다운 자태보다 낫다”하며 총애하였다.
두 형제들에게 정조 시기는 참으로 영광의 시기였으며 인생에서 보람찬 순간들로 가득차 있었고 형제간의 우의는 더욱 깊어졌다.
이때의 일화 가운데 정약용이 좌부승지로 있을때 고향이 그리워 중앙 벼슬아치가 허락없이 도성을 함부로 나가면 안 된다는
법을 슬쩍 어기곤 고향에 잠시 돌아가 형인 정약전과 강에서 고기를 잡고 산나물도 뜯고 술을 마시면서 시를 읊는 등 평안한 여가를 보냈다는 일화가 있는데 정약용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 일화를 일생에서 즐거웠던 순간들 중 하나로 언급하기도 했다.
외로운 천지 사이에 우리 손암(정약전) 선생만이 나의 지기였는데, 이제는 잃어버렸으니, 앞으로는 비록 터득하는 바가 있더라도 어느 곳에 입을 열어 함께 말할 사람이 있겠느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차라리 진작에 죽는 것만 못하다. 아내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자식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형제 종족들이 모두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처지에 나를 알아주던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슬프지 않으 —-
율정에서의 마지막 만남 이후 유배시절 때도 두 형제는 서로 편지를 보내면서 형제간의 애틋한 정을 표현하였다.
정약용 본인은 \'나는 강진 땅에서 그나마 편안하게 살고 있지만 형님은 그 험한 섬 생활을 어떻게 하실까 \\'하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저술할 무렵 정약용에게 편지를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약용은 편지로 그림보다 글로 쓰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해주었고 정약전은 바다에서 생활하는 와중에 정약용에게 조석이 발생하는 까닭은 달에 있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정약전은 정약용의 많은 저술에 대해 일일이 답을 해주었는데, 정약용은 형의 조언을 따르면 의심났던 글과 서로 맞지 않던 수가 모두 신기하게 들어맞아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그 외에도 정약용이 정약전의 건강을 염려하여 박제가에게 전해 들었던 개고기 조리법 편지[13]와 재료인 들깨를 보내기도 하는 등 그 우애가 같이 있을 때와 변함이 없었다.
두 형제는 단순히 형제지간을 넘어 학문적, 정치적 지기나 다름없었는데 이는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에서 정약전을 떠나보낸 뒤 애통해하며 쓴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장창대(1792~?)는 대둔도 출신의 어부다. 문순득이 『표해시말』을 만든 동반자라면, 장창대는 『자산어보』를 만든 동반자였다.
비록 현실을 중요시하던 실학자였던 정약전이었고, 물고기에 대해서 알고자 해부까지 할 정도로 열정이 넘쳤지만 물고기의 생태에 대해서 알기에는 양반으로서 한계가 있었다.
도움이 되던 사람이 바로 장창대였다. 정약전은 수많은 어부 중에 책을 읽기를 좋아하며 관찰력이 좋은 장창대의 도움으로 물고기의 생태 지식을 배우게 된다.
자산어보에서 장창대의 조언이 많이 실려 있으며, 이 수준은 상어의 교미와 부화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나올 정도이다.
그리고 현대 생태학에서 관찰한 상어의 번식과 정확하게 일치할 정도로 장창대의 도움은 자산어보를 만드는 데에 큰 도움을 줬다.
나중에는 정약전이 장창대를 위해서 시를 지어주었을 정도이다.
가을 장마 3수[秋霖 三首]
良怪翻沙浪 참으로 이상하다! 모래물결 뒤집더니
無風十日喧 바람도 없이 열흘 동안 소란하네.
皺眉山不定 눈썹 찌푸린 듯 산이 흔들리고
瞬目電常奔 눈 깜짝할 새 번개가 달려간다.
一雨曾當霰 비 한번 내리려면 싸락눈이 먼저 오고
層溟浩發源 발원한 물이 넓은 바다에 넘실대네.
何時淸月下 어느 때에 맑은 달 아래에서
醉共爾開門 술 취한 그대와 함께 문 열어 젖힐까
고기잡이 등불을 두보 시의 운을 짚어서[漁火拈杜韻]
今夜嗚濤息 오늘 밤엔 울부짖던 파도 소리도 그치고
漁燈照宿雲 고기잡이 등불이 잠든 구름을 비추네.
空靑一天面 하늘은 온통 푸른빛으로 덮혀 있고
錯落衆星文 뭇 별자리들 여기저기 흩어 있네.
隔葉時明滅 나뭇잎 너머로 이따금 깜빡이다가
憑虛任聚分 공중에 떠서 모였다 흩어지네.
不眠環數島 빙 둘러 있는 몇몇 섬 보다가 잠 못 들었는데
號噪曙紛紛 날 밝아 떠들썩하니 어지러이 흩날리네.
추석날 계고 선생과 사포 길가에 노닐며 두시의 운을 뽑아[仲秋同稽古先生遊沙浦路上拈杜韻]
逕細斜行壁 가느다란 길 비스듬히 절벽에 나있고
山環峭作城 둘러싼 산은 높다랗게 성을 이루었네.
層層深木合 층층히 깊은 나무가 우거지고
步步遠洲生 걸음걸음 먼 모래톱 생겨있네
仄嶺樵兒響 기울어진 봉오리에선 나무꾼 소리 울리고
孤花野蝶情 외로운 꽃에 들나비 마음을 붙이네.
民風有吉意 백성들 풍속에서 옛 뜻 남아 있으니
隨處臥凉楹 가는 곳마다 시원한 들보 아래 누웠구나.
사포에 몇 명이 모여 두보의 시에 차운하여[沙浦小集次杜韻]
三兩客將秋色來 서너 나그네가 가을빛 따라와
詩因遣興未論才 시 지으며 흥 돋우니 재주는 따지지 않네.
凉飇在樹蟬猶響 서늘한 바람 나무에 있건만 매미는 아직 울고
淸月盈沙雁欲回 맑은 달빛 모래에 가득하자 기러기 돌아오려네.
小屋靑山侵席冷 푸른 산 오막 집에 추위가 스며들자
四隣白酒捧杯催 사방 이웃들이 막걸리 잔을 건네네.
樵兒釣臾懽成友 나무꾼에 고기잡이까지 기쁘게 친구 되니
恣意家家笑語開 집집마다 마음껏 웃음꽃 피었구나
『자산어보』 서문에서
정약전은 “섬 안에 ‘장 덕순(德順) 창대’라는 사람이 있었다.
문을 닫고 손님을 사양하며 옛 책을 매우 좋아했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서문에 묘사된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의 관계는 사제보다는 동학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정약전이 쓴 ‘장창대에게 보내다(寄張昌大)’란 시에서도 정약전은 “사람들은 말하지 장창대를(人說張昌大)
/ 높고 높으며 뛰어난 유림이라고(迢迢逸士林)”라고 읊었다.
홍어 상인으로 유구(오키나와)와 필리핀까지 표류했다가 간신히 돌아온 문순득의 이야기를 처음 글로 쓴 인물이 정약전이다.
여송국(呂宋國)의 표류인(漂流人)을 성경(盛京) 이자(移咨)하여 본국(本國)으로 송환(送還)시키게 하라고 명하였다.
앞서 신유년(1801년) 가을 이국인(異國人) 5명이 표류하여 제주(濟州)에 도착하였는데,
알아들을 수 없는 오랑캐 들의 말이어서 무엇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다.
나라 이름을 쓰게 하였더니 단지 막가외(莫可外) (ht라고만 하여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자관(移咨官)을 딸려서 성경으로 들여보냈었는데, 임술년(1802년) 여름 성경의 예부(禮部)로부터도 또한 어느 나라인지 분명히 알 수 없다는 내용의 회자(回咨)와 함께 다시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그 중 1명은 도중에서 병이 들어 죽었다.
그리하여 우선 해목(該牧)에 머무르게 한 다음 공해(公廨)를 지급하고 양찬(粮饌)을 계속 대어주면서 풍토를 익히고 언어를 통하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그 가운데 1명이 또 죽어서 단지 3명만이 남아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나주(羅州) 흑산도(黑山島) 사람 문순득(文順得)이 표류되어 여송국에 들어갔었는데,
그 나라 사람의 형모(形貌)와 의관(衣冠)을 보고 그들의 방언(方言)을 또한 기록하여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그런데 표류되어 머무는 사람들의 용모와 복장이 대략 서로 비슷하였으므로, 여송국의 방언으로 문답(問答)하니 절절이 딱 들어맞았다.
그리하여 미친듯이 바보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서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는 정상이 매우 딱하고 측은하였다.
그들이 표류되어 온 지 9년 만에야 비로소 여송국 사람임을 알게 되었는데, 이른바 막가외라는 것 또한 그 나라의 관음(官音)이었다.
순조실록 12권, 순조 9년 6월 26일 을묘 1번째 언급
전라 감사 이면응(李冕膺)과 제주 목사 이현택(李顯宅)이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乙卯/命呂宋國漂人, 移咨盛京, 送還本國。 先是, 辛酉秋, 異國人五名, 漂到濟州, 而鴂舌聱牙, 莫辨魚魯。 寫其國名, 只稱莫可外, 未知爲何國人。 移咨入送于盛京, 壬戌夏, 自盛京禮部, 亦未能確指何國, 回咨還送。 而一名在塗病故矣。 命姑留該牧, 給公廨, 繼糧饌, 使之習風土, 通言語, 其中一人又故, 只餘三名。 至是羅州 黑山島人文順得, 漂入呂宋國, 見該國人形貌衣冠, 其方言, 亦有所錄來者。 而漂留人容服, 大略相似, 試以呂宋國方言問答, 則節節脗合。 而如狂如痴, 或泣或叫之狀, 甚可矜惻。 漂留已爲九年, 而始知爲呂宋國人, 所謂莫可外, 亦該國之官音也。 全羅監司李冕膺、濟州牧使李顯宅, 具由以聞, 有是命。
조선으로 돌아온 문순득은 흑산도에 들렀다가 정약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주었고,
정약전은 그의 이야기를 날짜별로 정리하여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표해시말' 집필을 계기로 문순득은 정약전과 우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문순득은 정약전을 가족처럼 모셨고,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사망했을 때는 극진하게 장례도 치러주었다.
정약용도 형 정약전을 통해 문순득의 친절을 알고 있었기에 문순득이 아들을 낳았을 때 아들 이름도 지어주고, 형 정약전이 사망 후 문순득이 장례를 잘 치러준 것에 대해 감사의 편지도 보냈다.
참고로 '표해시말 의 말미엔 112개의 한국어 단어를 한자로 적은 뒤 류큐어(81개)와 필리핀어(54개)로 싣고 있어서 언어학적으로 가치가 높다.
이때문에 일본에서는 이미 100여년 전에 이 책이 완역되었고 한국에서도 2005년 완역본이 발간되었다.
문순득이 살았던 집이 현재도 우이도에 남아있으며, 문순득의 후손이 정약전 선생이 살던 유배지 집터 자리를 구입하여 담을 치고 돌보고 계시다고 한다.
대둔도 출신의 어부. 자산어보에는 덕순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기도 한다. 문순득이 표해시말을 만든 동반자라면, 장창대는 자산어보를 만든 동반자였다.
비록 현실을 중요시하던 실학자였던 정약전이었고, 물고기에 대해서 알고자 해부까지 할 정도로 열정이 넘쳤지만 물고기의 생태에 대해서 알기에는 양반으로서 한계가 있었다.
이때에 도움이 되던 사람이 바로 장창대였다. 정약전은 수많은 어부 중에 책을 읽기를 좋아하며[16] 관찰력이 좋은 장창대의 도움으로 물고기의 생태지식을 배우게 된다.
자산어보에서 장창대의 조언이 많이 실려 있으며, 이 수준은 상어의 교미와 부화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나올 정도이다.
[ 타 문헌 문서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