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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뤼흐 스피노자 삶의 철학

이인이 2025. 6. 4. 05:15






< 바뤼흐  스피노자 >


1632년 11월 24일 ~ 1675년 2월 21일)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포르투갈계 유대인 혈통의 철학자이다.

스피노자는 과학적 지식을 중시하면서도 직관적 체험을

존중하고,  전체론적 틀을 갖고서도 개체 생명을 소중히

여겼으며, 종교적 심성을 지닌 동시에 탈종교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 바뤼흐 스피노자의   철학 윤리 >


스피노자는 윤리에 관하여 그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선이거나 악인 것은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동일한 사물이 동시에 선이고 악일 수 있으며, 또 양자와 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음악은 우울한 사람에게는 좋고, 슬픈 사람에게는 나쁘며, 귀머거리에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또한 신은 선한 자나 악한 자에게 동일하게 해를 비추며, 불의한 자나 의로운 자에게나 동일하게 비를 내려준다.


그리고 개인은 이러한 선악의 윤리를 바탕으로 더 큰 역량, 활동성, 기쁨 및 자유을 위해 나아가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스피노자의 이러한 주장은 매우 이상적인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면, 그들 사이에 분쟁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우리가 공통적인 부분을 가지고 어떤 것의 본성을 우리와 일치한다면 그것은 본성상 우리와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과 일치하는 한,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선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관계에 있어서 그만큼의 역량이 증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사물이 본성상 우리와 공통적인 것이 많을수록, 그것은 더욱더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러나 정념의 지배를 받는 한, 인간 존재는 어떤 것을 본성상 일치시킬 수 없다.

정념은 우리 자신의 본성보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외부의 수많은 사물들의 자극을 더 많이 반영하므로,


우리는 그 사물들의 자극이 우리의 본성이라 착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념이라는 정서에 의해 갈라지는 한, 사람들은 각기 처한 정념의 상황에 따라 의견이 달라질 수밖에 없고 서로 대립하게 된다.


반대로 이성의 지도에 따라 유덕하고 능동적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 본성상 일치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이성의 지도를 따른다면, 그들은 실로 자신들의 인간 본성에 좋은 것을 추구할 것이고, 


결국 우리는 분명, 타인과의 협동과 유대를 통해 잃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획득한다.


그는 이성의 힘에 의해 능동성을 띠게 되는 욕망를 논의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개인의 활동 역량의 확장과 증대를 위한 사회의 구성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혼자 살아가는 것보다 마음맞는 두 사람의 역량이 합치면 더 큰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이 협력하여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에게 매우 유익하다.

사람들은 사회를 조직함으로써 위험에 더 잘 대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유지하는 데 더 안정적인 조건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인의 힘만으로 해낼 수 없었던 많은 새로운 일들이 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자신들의 내적인 역량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스스로를 좀더 유능하고 풍요롭게 만들고자 노력한다.


동시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우애로 결합하고자 하며, 호의와 친절을 베풂으로써 서로의 기쁨을 증대시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성은 우리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보다 서로 일치하고 협력함으로써 자신들을 좀더 유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사상을 지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고,체제 전복적 무신론을 가리키는 비난의 용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피노자의 사상은 유럽 전역에 퍼져서 급진적인  계몽 운동으로  고취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은밀하지만 널리 확산된 이 운동은 계시 종교와 교회 권위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정치권력, 시민 평등 및 심지어 성 역할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 사유의 자유를 고취시켰다. 


스피노자와 스피노자주의가 사실은 모든 곳에서, 즉 네델란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및 스칸디나비아에서 뿐만 아니라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유럽 급진적 계몽 운동의 지적 중추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은 그 당시는 물론이고 그 시대에 대한 역사가들의 설명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더욱이 이 집단의 사람들의 저서에서 『에티카』나 『신학정치론』의 고유한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피에르 베일은 17세기 후반 가장 독자층이 넓었던 저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저서는 여전히, 심지어 오늘날 까지도 논의되고 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지를 바로 이해하기 힘들게 하는 흥미롭지만

난해한 방식으로 그가 저술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  대한 베일의 관계는 이중적이다.

첫째로, 1697년 『역사적 비평적 사전』을 출간하였으며, 거기에는 스피노자의 삶과 사상에 관한 매우 긴 항복이 수록되어 있다. 


표면적으로 그 항목은 스피노자의 역설적 사상을 반박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로 『에티카』를 읽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수많은 독자들에게 스피노자의 체계를 더 잘 알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스피노자는  영향에 관한 이야기에서 베일이 역할을 맡았던


두 번째 방식은 그가 사전에서 뿐만아니라 그의 초기 저작에서도 제시했던 전기적 설명에서 유래한다


무신론자가 공동체에서 관용될 수 있는지에 관해 그 당시에 활발한 논의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했던 가정은, 무신론자는 벌을 두려워하거나 사후 보상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고 서약을 위반하고 거짓 증언을 하면서 공공의 평화와 그는 무신론자이면서도 덕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전형적인 예로서,


무신론을 지지하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그의 삶이 근거로 제시되고 인용되었다.


18세기 초, 『신학정치론』은 에티카보다 훨씬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신학정치론』은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및 영어로 번역되었으며, 도처에서 수많은 반박이다.


저서는 프랑스어권 유럽 전역에 스피노자의 사상을 확산시키고 알리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스피노자의 사상은 프랑스 계몽운동의 자유사상을 신봉하는 철학자들에게 점차적으로, 그러나 끊임없이 침투되어 그들에게 영향력을  주었다.


당시 독일에서 스피노자의 사상은 크리스찬 볼프의 철학을 둘러 싼 논란의 맥락에서 상당히 자주 논의되었다.

볼프는 할레 대학 교수로, 그의 적대자들에게는 의심을 살만한 정도로 스피노자주의와 유사한 것처럼 보였던 체계적인 형이상학적 견해를 발전시켰다. 

그는 1723년 왕의 명령으로 지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되었지만, 계속해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고 옹호했다.


그의 사상은 사실 스피노자보다 라이프니츠에 더 가까웠지만, 논란에 의미가 있었던 것은 부분적으로 볼프에 대한 비난은 스피노자의 견해에 주목하게 했고 원문에 대한 더 진지한 연구를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볼프의 추방을 둘러싼 논란의 와중에, 성서의 텍스트로부터 초자연적이거나 기적적인 것에 대한 모든 언급을 제거할 목적으로 세심하게 만들어진 『베르트하임 바이블』이 요한 로렌츠 슈미트에 의해서 저술되었다.


볼프는 사적으로 슈미트를 지지했으며, 따라서 『베르트하임 바이블』은 볼프 철학의 자연스런 결과라는 의혹이 만연해 있었다. 


적대자들은 이러한 독해가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과 그것의 자연주의적 성서 비판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에게서 기대될 수 있는 종류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예상은 맞았고, 슈미트는 1744년 『에티카』의 독일어 번역본을 출간했다.


이 슈미트 번역본의 출간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66년 앞서 『유고집』 원본과 동시에 출간된 네덜란드어본 이래 유럽 언어로 처음으로 번역되어 유일하게 출간된 『에티카』 번역본이기 때문이다.


슈미트의 『에티카』 독일어 번역본은 수 세대에 걸쳐 독일의 철학자들에게 스피노자 체계를 소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고트홀드 에프라임 레싱은 시인, 극작가 비평가 및 독일 계몽주의 시대에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종교적 관용과 사상의 자유 지지자였던 그는 이러한 주제들로 대중적이고 시대에 어울리는 고전적인 희곡을 썼다.


그 또한 볼프 철학을 포용하면서 전통적 신앙을 고수했던 모제스 멘델스존의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다. 


멘델스존은 자신의 친구 레싱이 스피노자식 범신론이라는 오피에르명으로 기억되는 것을 원치않았고 그 둘 사이에 논쟁이 펼쳐졌다.


멘델스존은 스피노자주의가 아니었고 전통적인 종교를 옹호했지만, 종교에서 이성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에 한에서 스피노자를 지지했다. 


하지만 야코비는 이성은 스피노자의 신 이외의 어떠한 신으로도 우리를 데려다 줄 수 없으며,

이러한 철학자의 신은 전혀 진정한 의미의 신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의 필사의 도약으로 이성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범신론 논쟁으로 불리는 것으로, 사상계는 도처에서 격렬한 찬반 논의가 벌어졌으며, 이를 통해 공개적인 장소에서 스피노자의 사상의 철저한 검토와 재평가가 시작되었다.


가장 열정적인 스피노자 지지자들 중에는 그 당시 가장 중요한 독일 작가인 괴테가 있다.


잘 알려진 몇몇 구절에서 그는 스피노자의 유고집을 읽었을 때의 갑자기 밀려들었던 숭고한 느낌을 표현하기도 했다. 


스피노자의 고요함은 전방위적인 나의 노력에 대비되어 부각되었다. 이를테면 그의 수학적 방법은 관찰과 묘사의 나의 시적 방식을 보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도덕적 주제에 적절하다고 생각할 수 없었던 그의 형식적 처리방식이 바로 나로 하여금 열정을 가지고 그에게서 배우게 했던 것이며 그를 더욱더 칭송하게 만든 것이다."


괴테에게 영향을 받았던 독일 낭만주의 운동의 몇몇 구성원들은 스피노자 철학의 여러 가지 측면을 받아들였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사람은 초기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일 것이다. 그는 스피노자를 무신론자로 간주했던 기성 세대의 견해를 뒤집어 버렸다. 

반대로 노발리스는 스피노자가 "신에 취한 사나이"라고 반박했다. 

또한 칸트 이후의 독일 관념론자들에게 스피노자는 큰 영향을 끼쳤다. 헤겔과 셸링은 모두 스피노자에 대해서 대단히 긍정적으로 서술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헤겔은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스피노자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헤겔은 스피노자의 입장을 필연적 출발점으로서는 받아들였지만, 결국 수용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형이상학적 관념론의 관점에서, 그는 스피노자의 실체가 자기-의식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이러한 재평가는 주목할만 하다. 한때는 그의 사상이 반박의 목적으로만 언급될 수 있었지만,

그는 이제 근대의 가장 중요하고 훌륭한 철학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재평가는 주로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대륙을 가로질러 영국으로도 확산되었다.


영어권 나라들에 스피노자를 새롭게 소개한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 하나는 시인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였다.


콜리지 덕분에 스피노자 사상은 낭만파의 워즈워스와 그 밖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시기 스피노자에 첫 번째로 열광했던 사람들이 시인들이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예를 들면, 콜리지도 워즈워스도 스피노자 철학 체계의 각론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신과 자연의 동일시에 의해 영감을 받았고, 기하학적 설명에 강한 흥미를 느꼈으며 스피노자의 단순하고 유덕하고 지적으로 풍부한 삶에 감동을 받았다.


또한 니체가 『에티카』를 처음 접했을 때, "그는 선구자, 진정한 선구자!"라고 선언한 것도 유명하다.


니체는 친구 오버베크에게 흥분된 상태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짧은 편지를 썼다. 프로이트도 스피노자 독해를 진행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베르그송은 스피노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철학자에게 두 명의 철학자가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스피노자다." 비슷한 시기에 버트런드 러셀도 스피노자를 이렇게 평가했다. "지적인 면에서 그보다 뛰어난 철학자들은 있지만, 윤리적인 면에서 그를 따라갈 철학자는 없다."


현대에 들어서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1960년대 후반
마르시알 게루를 필두로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스피노자의 새로운 면모를 찾아내었다.


< 바뤼흐 스피노자   명언 >


스피노자가  남긴 명언은 그의 철학적 체계와 범신론적
세계관, 인간의 자유와 윤리에 대한 사상을 보여  준다.

명언 1


신은 곧 자연이다. (Deus sive Natura)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을 동일시하며, 신을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내재적 실체로 보다. 이는 그의 범신론적 세계관의 핵심을 보여준다.


명언 2


자유란 필연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 법칙에 따라 존재하고 행동하지만, 이 법칙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는 스피노자가 자유를 이성과 조화된 삶으로 정의한 것이다.

명언 3


행복은 선을 실천하는 데 있다.


스피노자는 진정한 행복은 외적 보상이 아닌 이성을 통해 선한 삶을 사는 데서 온다고 보고, 윤리적 행동의 내재적 가치를 강조한다.


명언 4


모든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노력,

즉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다.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가 자신을 보존하려는 본질적 힘(코나투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 코나투스는 그의 윤리학과 인간 동기 이론의 중심 개념이다.


명언 5


진정한 지식은 신과 자연의 필연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신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궁극적 지식이라고 보았다. 이는 경험적 지식과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선 참된 이성적 이해를 못한다.


명언 6


감정은 다른 감정에 의해서만 정복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감정이 자연 법칙의 일부라고 보며, 부정적인 감정은 긍정적인 감정과 이성적 이해를 통해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명언 7


슬픔은 우리의 활동 능력을 감소시키고, 기쁨은

우리의 활동 능력을 증가시킨다.


스피노자는 감정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며, 긍정적인 감정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보았다.


명언 8


신은 인간처럼 생각하지 않으며, 인간의 감정을 가지지도
않는다.


스피노자는 신을 초월적 존재로 인간화하지 않고, 필연적 자연의 원리로 이해. 이는 종교적 도그마와 인간 중심적 신 개념을 비판한 것이다.


명언 9


평화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


스피노자는 평화를 단순히 물리적 갈등의 부재가 아니라, 이성과 조화된 내적 상태로 정의한다.


명언 10


최고의 국가란 자유로운 개인들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이성적 삶을 존중하는 정치 체제를
이상으로 보았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다.

스피노자의 명언은 그의 철학적 원칙, 특히 자연과 신의 동일성, 이성과 자유의 중요성, 윤리적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반영합니다.

그의 사상은 현대 철학과 윤리학, 정치학, 심리학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  타   문헌   문서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