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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장미 전쟁 ( Wars of the Roses)

이인이 Lee ine 2025. 8. 11. 19:22



이인이  


장미전쟁    


영국 내전  왕위  다툼


프랑스  쟌다르크 에  패배  후  일어난   영국 내전.

영국의  르네상스  시대  그리고   근대 국가로의  기반  조성.

영국의  장미전쟁 (  Wars of the Roses )







장미 전쟁


(  Wars of the Roses)

붉은 장미를 표시로 삼은 랭커스터 왕가와 흰 장미를 표시로 삼은 요크 왕가 사이의 왕위 쟁탈전이었다.

1455년부터 1485년까지 벌어졌다.

요크 공작 리처드는 헨리 6세의 발병을 틈타 1453년 호민관 겸 방위관이 되어 랭커스터가의 중심세력인 서머셋 공작과 싸워, 장미전쟁을 일으켜 그를 멸하였다.

1460년에 리처드는 왕위를 요구하여 헨리 6세의 사후 왕위 계승이 승인되었으나, 랭커스터파의 반대로 리처드는 전사하였다. 리처드의 아들 에드워드는 1461년 랭커스터가를 격파하고 왕위를 획득하여 에드워드 4세가 되었다.

이윽고 요크가 내부에 불화가 일어나, 1483년 에드워드 4세의 사후, 에드워드 5세와 그 동생이 에드워드 4세의 적자가 아니라는 명분으로 에드워드 4세의 동생 글로스터 공 리처드가 리처드 3세로서 즉위하였다.


이에 어머니 계통으로 왕실에 연결된 랭커스터가의 유일한 왕위 요구자인 헨리 튜더가 1485년 망명지인 프랑스에서 귀국하여 1485년 보스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격파하고 헨리 7세로 즉위하였다.

이로써 장미 전쟁은 끝나고 튜더 왕조가 열리게 되었다.



13세기말, 근대적 형태의 주권 국가가 나타나려는 징후가 있었다. 이전 시기의 중복되는 사법권은 점차 일원화되어가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권위를 행사하는 하나의 정부가 있었다.


14세기 초에 영국과 프랑스는 주권 국가의 등장에 필요한 모든 특징들, 즉 크기, 통일, 안정된 왕조를 갖고 있는 유일한 국가였다.

영국은 이미 단일적 정치적 단위였고 왕의 궁정에서 이루어지는 결정들은 왕국 전역에 걸쳐 적용되었다. 특권 계급의 대표들을 중앙의 회의에 소집하는 의회가 이미 이용되고 있었다.

1307년에서 1485년 사이에 영국에서는 9명의 왕들 중에서 6명이 퇴위당하고 5명은 살해당했다(에드워드 2세, 리처드 2세, 헨리 6세, 에드워드 5세, 리처드 3세). 에드워드 4세는 퇴위되었다가 다시 왕위를 되찾았다.


프랑스에서의 실패는 영국에서 장미전쟁으로 이어졌다. 토지와 좋은 관직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왕가의 어느 가문이 더 정당한 왕위계승권을 갖고 있나를 결정하는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70여년에 걸친 교황의 아비뇽 유수(1309~1378)는 교황의 권위로 더욱 실추시켰다. 클레먼트 5세(1305~14)는 교황 우위에 있어서의 프랑스 시대의 문을 열었다. 영국왕의 프랑스 신민으로 부르도우의 주교인 클레멘트는 필립 4세의 지지를 받은 타협적 선택을 했다.


1417년부터 1537년에 이르는 기간의 교황들은 대부분 왕후출신이거나 인문주의자인 교인들로 주로 채워졌다. 쇼 쇼
이 시대의 대부분의 교황들은 교회를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회복시키려고 주력하였다. 마틴 5세(1417~31)는 분열을 종식시키고 로마의 건국재건을 시작하였다.


영적인 영역에서 르네상스 교황들은 교황의 대권과 신앙의 기탁을 주장했다. 선교활동을 지원했고 어떤 분야에서는 온건한 개혁을 하고 르네상스의 보다 낳은 국면들의 후원자가 되었다.


중세 후기에 일어난 혁명적인 이론과 운동은 중세의 기독교를 흔들어 놓기 시작했다.


피에르 뒤부아의 「성지의 회복」에서 교회의 영적 우위를 인정했으나, 교회의 세속사에 대한 군주의 통어를 주장했고, 피두아 마르시그리오의 「평화의 수호자」에서 국가와 교회의 권위는 모든 인민의 의지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다.


교회는 민주적 사회로 신앙인들의 연합체라고 했고 인민을 대표하는 일반공의회는 교황보다 우위에 있으며, 그는 단지 일종의 대통령같은 존재라고 했다.


성자자회의 운동은 이를 사상의 일부를 채택히 교회헌법에 도전했다. 그리고 기독교의 합리적 기반인 추상적 보편개념을 부인한 오캄주의나 직접적인 신에의 경험을 강조한 신비주의는 교회와 규율을 파괴하게 되었다.


또한 중세 후기의 발효로부터 이단들은 기존의 교회조직과 실행들을 공격하였다.


많은 성자와 축복 받은 사람들이 이 시대에 살았고 당시의 민간인이나 종교인들의 다수가 선한 종교개혁을 바라고 있었으며 높은 수준의 경건 생활을 했다.


중세 말 잉글랜드의 부는 토지였는데, 토지 경작에 대부분의 영국인들이 종사하였다.

그들은 곡물을 기르고 낙농품을 생산하였으며, 가축을 돌보았다.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던 직물은 토지에 간접적인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종종 대규모의 양떼로부터 유럽에서 가장 질 좋은 양모를 생산하고 있었다.

영국 상선은 연안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외국의 선박수송에 의해서 눌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스코뉴의 포도주와 모직물을 저지대 국가들로 해상 운송하는 것은 점차 영국상인들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고, 점차 영국선박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촌락 주변에 흩어진 시장과 장의 숫자가 많아졌고 소규모 도시와 촌락의 대부분이 그들의 시골 배후지와 통합되는데, 그것이 부유한 주민들이 길드에 가입하고 도시주택을 사거나 임대하여 도시 관직을 차지하는 등 도시 생활에서 얼마간의 역할을 수행했다.


일부 항구를 포함하여 소수의 도시는 더 커졌고, 더 넓은 사업권을 가졌다.

이같은 부에서 개인과 단체 그리고 국왕의 분쟁이 일어났다. 최대의 지주는 속인 대영주들, 주교들과 수도원들, 그리고 다른 종교단체들이었다.

1300년대에 그들은 전 세기의 인구팽창을 창출된 시장 붐을 통하여 여전히 상당한 이득을 얻고 있었고, 물가가 오르고 토지수입이 상당했다.


효율적인 경영에 개인적인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토지보유 농민들로부터 높은 지대를 짜내고 장원법정에서 보유지에 부과한 의무를 세심하게 기록하는 등 가능한 한 그들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같은 토지재산이 귀족들의 정치적이며, 행정적인 영향력, 그리고 사회적인 영향력의 토대였다.


모든 사람들 가운데 왕이 최대의 지주였는데, 그것은 에드워드 1세가 웨일즈 공국을 획득하고 1399년에 랭커스터가의 영지들이 왕령지에 통합되기 이전에도 역시 그러했다.


14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번영했던 집약농업 시대가 거의 지나갔다. 물가는 내리고 있었고, 시장을 위한 경작도 수익이 줄고 있었다. 임금은 오르고 있었는데 수공업자들보다 농업노동자들의 임금이 더 올랐다.


대규모 농업경영이 매력을 상실하고 있었던 주요한 이유는 인구붐이 끝나고 급속도의 인구하락이 시작한 데 있었다.


흉작과 흑사병, 빈곤, 기아, 사망률 상승이 이용할 수 있는 노동자 수를 줄게 하자 임금이 올랐다.


처참한 죽음에서 살아남았던 사람들에게 14세기 말과 15세기 동안의 삶은 그 이전과는 달라졌다. 많은 농민들에게 그 때는 기회와 야망, 풍요의 시대가 되었다


. 농민들은 축소된 노동시장에서 몇 세기 동안의 무능을 떨쳐버리고 지대를 낮추도록 빈번히 압력을 가할 수 있었으며, 또 자신의 고용에 대한 더 나은 임금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물가폭락과 함께 그들의 생활수준도 향상되었다. 더 성공적이고 야심 많은 농민들은 새로운 토지를 임차했고 여분의 현금을 그들 동료들에게 대부하는 방식으로 투자하였다.


토지 소유자들은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다.
밀과 양모 그리고 기타 상품의 시장생산에서 수익이 줄었고, 잉글랜드의 경작지 면적이 축소되었으며, 농업투자가 줄어들었다.


임금과 다른 비용이 올랐으며 번성하는 농민들에게 임대지로 임대하기 위해 집약농업 기술을 포기하는 것이 현명한 것 같았다.


14세기 잉글랜드에서 경제적 ․사회적․정치적․군사적 긴장들이 누적된 결과로는 농민반란(1381)에서 가장 생생하게 드러난다.

1381년의 농민반란(와트 타일러의 난)은 농민반란의 격렬함과 범위, 그리고 광범위한 호소력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것이었으나, 근본적인 성격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 성격은 뒤따라 일어난 다른 모반과 봉기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 것이다. 농민반란의 결과로는 그 동안 정부가 강력히 주장하던 노동자 법령을 14세기 말에 폐지하고 임금 문제를 협조적으로 조정하는 일을 담당하는 치안 판사를 정부가 파견하도록 하는 데에서 조금이 변화가 일어  났다.


이러한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에, 영국 통치 가문이었던 플랜타제넷가는 가문 내 분열이 발생하였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그의 아들들을 위한 영지를 만들었다. 1337년에 에드워드를 위한 콘월 그리고 1362년에 리오넬을 위한 클래런스 와 존을 위한 공작을 만들었다


1337년 콘월 공국이 세워지기 전까지[10], 공작들은 군주에 의해서 어떤 사례에 대해서도 지위를 수여받은 적이 없었으며, 그들의 기원은 현 왕권에 견줄만한 세력으로, 강력한 새로운 영국 귀족 계층의 시초가 되었다.


장미전쟁은 요크 가문(흰 장미)과 랭커스터 가문(붉은 장미)이 왕위 계승을 두고 벌인 내전이다.


결국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7세가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승리해 전쟁을 끝냈고,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두 가문의 갈등을 종식시켰다. 이로써 튜더 왕조가 시작되었다.


튜더가는 왕족의 혈통도 아니었고 뛰어난 가문도 아니었다.

보스워스전투에서 이겨 헨리 7세가 즉위함으로써 튜더왕조가 열렸고 장미전쟁도 마침내 종결되었다.


헨리 튜더는 요크가문의 여인이며 에드워드 4세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랭커스터와 요크 두 가문의 대표자이자 상속인으로 자처하며 두 가문의 화합을 확고히 하였다. 이로써 장미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장미 전쟁의 주요 전투


1450년대
제1차 세인트올번스 전투: 1455년 5월 22일, 요크 군 승리.
블로어 히스 전투: 1459년 9월 23일, 요크 군 승리.
루드포드 브릿지 전투: 1459년 10월 12일, 랭카스터 군 승리.


1460년대

노스햄프턴 전투: 1460년 7월 10일, 요크 군 승리.
웨이크필트 전투: 1460년 12월 30일, 랭카스터 군 승리.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 1461년 2월 2일, 모티머스 크로스 전투, 요크군 승리.
제2차 세인트올번스 전투: 1461년 2월 17일, 랭카스터 군 승리.
페리브리지 전투: 1461년 3월 28일, 요크 군 승리.
토우턴 전투: 1461년 3월 29일, 요크 군 승리.
헤질레이 무어 전투: 1464년 4월 25일, 요크 군 승리.
헥스헴 전투: 1464년 5월 15일, 요크 군 승리.
에지코트 무어 전투: 1469년 7월 26일, 랭카스터 군 승리.


1470년대

루즈코트 무어 전투: 1470년 3월 12일, 요크 군 승리.
바넷 전투: 1471년 4월 14일, 요크 군 승리.
튀케스베리 전투: 1471년 5월 4일, 요크 군 승리.


1480년대

보스워스 전투: 1485년 8월 22일, 헨리 튜더 승리.
스토크 전투: 1487년 6월 16일, 튜더 가의 헨리 7세 승리.


장미전쟁은 32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영국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진 일련의 전투였기 때문에 많은 핵심 지도자가 전투 중 사망하거나 자연사, 혹은 처형 및 암살 등으로 인해 변화했다.


장미전쟁은 영국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를 크게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전쟁 이후 튜더 왕조의 등장은 영국의중세시대를  끝내고 르네상스와 근대시대 로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타   문헌   문서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