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세기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이인이 2025. 6. 10. 15:53


이인이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 )








빈센트  반  고흐


핀선트 빌럼 판 호흐

( 네덜란드어 [ˈvɪnsɛnt ˈʋɪləɱ vɑŋ ˈɣɔx] )


(  1853년 3월 30일 ~ 1890년 7월 29일)

네덜란드의 화가로서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 전부(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0여 점의 습작들)를 정신질환을 앓고 자살하기 전의 단지 10년 동안에 만들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사후에 인정 받았다. 특히 1901년 3월 17일 파리에서 71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명성을 얻었다.


반 고흐를 흔히 탈인상주의 화가로 분류하며, 또한 인상파, 야수파, 초기 추상화, 표현주의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며 20세기 예술의 여러 다른 분야에 영감을 주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반 고흐의 작품과 그 동시대 작품을 전시한다. 네덜란드의 오테를로, 크뢸러-뮐러 박물관도 상당히 많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소장했다.

빈센트 빌럼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주 쥔더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테오도로스 반 고흐(Theodorus van Gogh, 1822~1885)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목사였으며, 어머니는 아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카르벤튀스(Anna Cornelia van Gogh-Carbentus, 1819~1907)였다.


빈센트 빌럼이라는 이름은 1년 전 사산되어 죽은 형의 이름이기도 했다.


빈센트\'라는 이름은 레이던 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한 미술상이었던 그의 할아버지 빈센트(1789~1874)가 지어준 것인데, 반 고흐 가문에서 흔한 이름이었다.
빈센트의 어머니는 헤이그의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목사의 막내 아들이었다.


둘은 빈센트의 이모 코넬리아가 테오도로스의 형 빈센트와 결혼했을 때부터 교제를 시작했다.


빈센트의 부모는 1851년 5월에 결혼했고, 곧이어 쥔더르트로 이사했다. 남동생 테오도뤼스 테오는 1857년 5월 1일에 태어났다.

형제자매와는 사이는 그렇게 좋은 게 아니어서 빈센트는 오직 빌레미나, 테오도뤼스하고만 연락을 주고받았다.

빈센트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은 여성으로, 주변에 항상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아버지는 목사였기 때문에 적은 봉급을 받았지만, 아버지가 부임한 교회에서 가족에게 집, 하녀, 요리사 두 명, 정원사, 마차, 말을 제공했다.

빈센트는 진지하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 전해진다. 집에서 어머니와 가정교사에게 가정교육을 받았고,

1860년에는 200명 정도의 아이들이 다니고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 성격의 쥔더르트 마을 학교로 보내졌다.

하지만 부모의 권유로 입학했던 기숙사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서 1861년부터 새로운 학교에 입학하기까지 3년 동안 그의 여동생 안나와 함께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864년에는 집에서 32km 떨어진 개신교 교사가 운영하는 제벤베르헌의 기숙학교에 입학했는데, 빈센트는 거기서 가족에게 버림받았다고 느껴서 집으로 돌려보내달라고 떼를 썼다.


그러나 1866년에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집에서 멀리 떨어진 틸뷔르흐의 중학교로 보내졌다.


미술에 대한 관심은 어린 나이에 시작되었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빈센트에게 그림을 그리라 권유했는데,

초기 그림들은 후대의 그림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표현력이 풍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빈센트 틸뷔르흐의 빌럼 2세 국립중학교에 입학한 것도 파리에서 성공을 거둔 예술가였던 콘스탄트 코르넬리스 하위스만스(Constant Cornelis Huijsmans, 1810~1886)가 교사로 있기 때문이었다.


하위스만스는 기술적 완성도보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주는 인상을 포착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1868년 3월, 빈센트는 학교를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빈센트는 후에 자신의 학창시절이 "엄숙하고 차갑고, 무균적"이었다고 회고했다.

1877년, 아버지를 따라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빈센트의 열정에 부응하여 가족들은 암스테르담에서 존경받는 신학자인 이모부 요한네스 스트릭커(Johannes Stricker, 1816~1886)에게 보낸다.


거기서 빈센트는 암스테르담 대학교의 신학 입학 시험을 이모부의 지도 아래 준비했는데, 시험에 실패하고 1878년 7월에 이모부의 집을 떠났다.


이후 그는 브뤼셀 근교 라켄에 있는 개신교 선교 학교에서 3개월 과정에 등한다. 비록 전도사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했지만, 벨기에의 탄광지대인 보리나주로 파견된다.


1880년 말에 그는 네덜란드 예술가 빌럼 로엘로프스(Willem Roelofs, 1822~1897)의 문하생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냐는 테오의 권유에 따라 브뤼셀에 간다.


빈센트는 어느 학교에 소속되어 미술을 배우는 것을 싫어했고, 혼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결국 테오에게 설득되어 1880년 11월,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빈센트는 거기서 해부학, 소묘, 원근법을 배웠다.


빈센트는 헤이그로 돌아와 마우베에게 수채화를 배우고, 다음 달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교회에 가지 않겠다며 아버지와 다툰 끝에 다시 헤이그로 떠났다. 1882년 1월부터는 유화를 배운데다 마우베에게 돈을 빌려 화실을 세운다.

이 시기에 수채화 여러 점과 유화 200점도 남겼다. 이 시기의 그림은 주로 음침한 흙빛, 특히 어두운 갈색으로 구성되어있다.


빈센트는 자신의 작품이 침침하고 인기가 없다는 테오의 말을 기억하고 안트베르펜에서 미술관에 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을 감상하는 등 채색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림에 카민, 코발트블루, 파리스 그린 등 다채로운 색채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안트베르펜의 부둣가에서 일본에서 들어온 우키요에 목판화를 구입하며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이즈음 빈센트는 다시 폭음을 하기 시작한다. 1886년 2-3월에 과로, 부실한 식사, 과한 흡연으로 인해 병원에 입원했다.
1886년 3월, 빈센트는 아카데미를 떠나 파리로 이사한다.

파리에서는 몽마르트르에 있는 동생 테오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며,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의 화실에서 4월부터 5월까지 공부한다.


빈센트는 거기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화가 존 러셀을 만난다.

그 외에도 폴 세잔의 그림을 전시하곤 하던 줄리앙 탕귀의 미술용품점에서 에밀 베르나르, 루이 앙크탱,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를 만나 친분을 쌓는다.


리앙 탕귀의 가게에서는 같은 해에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의 점묘화와 신인상주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테오는 인상주의 화들의 작품을 계속 수집했지만, 빈센트는 이런 새로운 종류의 화풍을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빈센트는 파리에 살면서 친구와 지인들의 초상화, 정물화, 여러 풍경화를 그렸다.


안트베르펜에서 시작된 우키요에 목판화에 대한 관심은 점점 깊어져, 수백 점의 목판화를 수집해 파리 작업실 벽을 장식하기도 했다.


게이사이 에이센이 그린 오이란 그림의 모작을 그리기도 했다.

들라리바렛(Delareybarette) 미술관에서 아돌프 몽티셀리의 초상화를 본 후로부터는 더 밝은 색채와 대담한 붓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1888년 그린 생트마리 해변의 고깃배 그림에서 잘 드러난다. 빈센트와 테오는 몽티셀리의 그림을 수집하기도 했다.


이들은 전시회에서 예술과 사회에 대한 논의를 이어나갔는데, 카미유 피사로, 조르주 쇠라, 폴 시냐크와 같은 전시회 방문객들도 이 논의에 참여했다.


1888년 2월, 2년 동안 200점 이상의 그림을 그린 빈센트는 요양을 위해 파리를 떠났다. 출발 몇 시간 전, 테오와 함께 쇠라의 화실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1890년 7월 27일, 오베르쉬즈우아즈 밀밭에서 자신에게 총을 쏜 고흐는 이틀 후 라부 하숙집에서 동생 테오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고흐가 정말 자살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빈센트는 언급할만한 가치를 지닌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경탄해마지 않았던 옛 화가들의 그림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그 중의 몇 개의 작품들을 모사함으로써 미술에 대한 지식과 재주를 독학으로 익혔다.


그가 홀랜드에서 보낸 1880년-1885년 사이에 17세기에 활동했던 두 명의 네덜란드 화가가 그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주었다.


렘브란트와 프란스 할스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로부터 그는 다양한 갈색조, 회색조, 흑색조의 색채를, 음영이 뚜렷한 회화 기법을, 눈에 그대로 보이는 거친 붓자국이 있는 진하게 칠한 채색 기법을, 그만큼 더 강렬한 전체 효과를 얻기 위해서 세부적인 묘사를 포기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옛 거장들이 그림들을 지나치게 세세하게 다루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아주 경탄해마지 않았고, 빈센트롤도 자신도 평생 동안 이 원칙을 고수했다.

홀란드 그림들을 다시 볼 때 나를 당혹시키는 것은 그들이 대개의 경우 아주 빠르게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다.


한스, 렘브란트, 루이스달이나 다른 많은 화가들처럼 위대한 거장들이 가능한 한 일필휘지로 그림을 그린 다음에 더 이상 그 그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반 고흐,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내용적으로 고흐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주제, 즉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를 다루었다.


빈센트는 \'홀랜드 시기\'에 일을 하고 있는 농부들, 그들의 가난한 오두막, 수공업자들을 그렸다.
정물화에서는 특이하게도 감자가 자주 발견된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그림에 진실될 것과 분위기, 감정 혹은 생각을 전달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런 요구가 자신이 모범으로 생각하는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충족된 것으로 생각했다.


감자먹는 사람들이 시기에 제작된 가장 야심차고 유명한 그림은 1885년에 그려진 〈감자먹는 사람들〉이다.


그 그림에서는 소박한 식사를 하는 농부 가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빈센트는 그 그림으로 시골 사람들이 땅과 맺고 있는 상태와 가혹한 삶을 묘사하고자 했다.


그는 이 그림에 상당한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는 그럴듯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집단으로 묘사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빠듯한 생활비에도 불구하고 모델들을 고용했고, 여러 장의 습작을 그렸다.


<감자먹는 사람들〉이후로 빈센트는 더 이상 여러 인물들이 배치된 작품을 그리지 않았고, 단 하나의 그림에 그처럼 많은 노력을 쏟아 붓지도 않았다.


안트베르펜에서의 3개월간의 체류 동안, 무엇보다도 1886-1888년에 걸친 파리 체류 기간 동안 빈센트는 새롭고 다양한 인상들에 노출되었다.


그 자신의 작업에서 실험의 시기가 시작되었으며, 그 실험은 궁극적으로 그의 화법에 중대한 변화로 귀결되었다.


파리에서 그는 그 당시에 중요하게 간주되었던 인상주의와 대면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 그는 인상주의를 이름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양식에 대해서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빈센트는 인상주의의 여러 요소를 자신의 회화에 받아들였다.


그는 좀 더 밝고 순수한 색채를 사용했고, 가는 선으로 그은 듯한, 점 모양의 특징을 지닌 붓 놀림으로 넘어갔다.


그는 화면을 보색 관계를 이루는 색채로 구성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림과 만남으로써 좀 더 대담해진 색채 사용으로의 방향 전환이 강화되었다.


주제상으로 보자면 그는 파리적 소재에 관심을 기울였다. 파리 주변의 시골에서도 그는 자주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에 인상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는 〈봄날의 낚시〉, 〈클리시 다리〉, 〈아스니에르의 다리 모습〉, 〈몽마르트르 언덕의 채소밭〉 등이 있다.
그의 예술적 발전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일본 판화와의 만남이었다.


1853년 일본은 국경을 개방했으며, 그로부터 몇 년 동안 점점 더 판화를 찍은 종이가 유럽으로 전해졌다.


많은 미술가들이 전혀 새로운 미술에 열광을 했고, 빈센트롤도 매혹되었다.

그는 일본 채색 판화를 모으기 시작했고, 몇 개의 소재를 유화 작품으로 옮겨 제작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일본의 미술관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그들의 형상 원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실제적으로 그 이후부터 제작된 그의 그림에는 이런 저런 \'일본적\' 형상 원칙이 나타났다.


몸 때문에 생긴 그림자의 부재, 가는 선으로 테두리가 둘러쳐진 \'얕게\' 채색된 화면, 이례적인 원근법, 풍경 속에서 아주 작게 묘사된 인물들이 그런 원칙들이었다.


빈센트는 이 기간 동안 일본화를 접하고 관련 작품을 열렬히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화의 밝은 색채와 캔버스 공간의 사용, 그림에서 보인 선의 역할에 감탄했으며, 이러한 인상은 그에게 강하게 영향을 주었다.


이때 빈센트는 일본풍으로 약간의 그림을 그려 〈프로방스 시골길의 하늘 풍경〉, 〈별이 빛나는 밤〉,〈해바라기〉 등의 걸작들을 그렸다. 즉, 고흐의 그림 속에는 정신적인 고통과 이를 극복하고자 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아를에서 빈센트는 파리 시절에 이론적으로 발전시켰지만 지금까지는 일관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새로운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죽을 때까지 본질적으로 유지했던 이 화법은 우리가 오늘날 빈센트에게서 \'전형적\' 이라고 느끼는 화법이다.
고흐는 남부 프랑스의 눈부신 색채에 대한 희망을 품고서 아를로 이주를 했다. 그는 편지에서 이주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붉은색과 초록색, 푸른색과 오렌지색, 짙은 노랑색과 보라색의 아름다운 대조를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야.

실제로 그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전체적인 효과에서 상호상승을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보색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나란히 사용했던 순수하고, 강력한 색채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 그는 \'지방색\', 다시 말하자면 대상의 자연적인 색을 넘어섰다. 종종 그는 색채를 과장하거나 그가 각각의 그림을 위해서 발전시킨 색채 체계에 적합하도록 사용했다.


빈센트의 그림에서는 초록색 하늘, 분홍색 구름, 짙은 청색의 길이 있다. 그 자신도 그것에 대해서 적고 있다.
이외에도 색채는 빈센트 반 고흐에게는 상징적 기능도 지니고 있다. 〈밤의 카페 풍경〉(1888년)처럼 색채는 분위기를 표현해야만 한다고 한다.


나는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무시무시한 인간의 정열을 표현하려고 했어.


공간은 푸르고 붉으며 생기없는 노란색이지. 가운데에 초록색 당구대가 놓여 있고, 오렌지색과 초록색의 둥근 불빛을 만들어내는 레몬처럼 노란 4개의 램프가 있는 고흐는 재빠르게, 즉흥적으로 그리고 나중에 커다랗게 수정을 하지 않은 채로 그림을 그렸다.


신속하게 그리는 그의 화법은 한 편으로는 그의 창작욕에서 나오는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 아주 의식적으로 그것을 표현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그림에 더 많은 생기와, 강렬함과 직접성을 부여한다고 했다.


또한 그는 좀 더 커다란 전체 효과를 위해서 소재를 단순화했다. 비록 그가 재빠르게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충동적으로 그리거나 도취해서 그리지도 않았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는 머릿속으로 그려보거나 여러 장의 스케치를 통해서 준비를 했다.
거의 언제나 그는 소재를 눈 앞에 두고서 그림을 그렸다. 그가 기억이나 생각에 의존해서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눈으로 본 것을 종종 심하게 변행을 시키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연에 충실한 상태였고, 추상으로 통하는 경계선을 넘어서지는 않았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단순하게 재현하는 것이 고흐의 목표가 아니었다.

오히려 소재가 지닌 본질과 특성 그리고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욱 중요했다.
후기에 제작된 오베르의 풍경화는 화가는 형식과 색채를 변화시킴으로써 바라던 표현의 강렬함을 달성할 수 있었다.


형식의 경우에 고흐는 단순화를 향해 움직여 간 반면에 색채는 점점 강화시켰다.

그 밖에도 고흐는 다양한 상징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했다. 많은 그림에서 그는 언어를 통해서 말할 수 없었던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전래된 상징 이외에 그는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상징 언어를 사용했다. 그 상징 언어의 의미는 그의 생애, 사고와 감정 세계에 대한 앎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스케치 판, 파이프, 양파, 봉랍이 있는 정물화에서 그는 그에게 도움이 되었던 물건들을 배열했다.

건강 지침서와 그 책에서 불면증에 대해서 좋다고 권해준 양파, 그가 좋아하던 파이프와 담배통, 테오가 보낸 편지 한 통과 친구와의 밀접한 결합을 상징하는 봉랍, 삶의 불꽃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불타고 있는 촛대, 금주의 상징인 빈 포도주 병등이 그와 같은 대상들이었다.


〈달이 빛나는 밤의 산책〉(1890년)에서는 달이 솟아오를 때 올리브 정원과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풍경을 산책하는 한 쌍의 사람이 보인다.

남자 인물은 붉은 머리카락과 수염으로 화가 자신의 모습과 같은 특징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 그림은 여인과 함께 하는 \'진실한\' 삶과 그것의 대용인 자연과 자연을 표현하는 예술에 대한 빈센트의 소원을 동시에 표현한 것이다.


고흐는 훌륭한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소묘를 완벽하게 다룰 줄 알아야만 한다고 확신했다.


1880년, 선생이 없었기 때문에 교본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형상 묘사의 법칙을 소묘를 통해서 습득하기 시작했다.


홀란드 시대에 그는 무엇보다 평범한 농부와 풍경, 그 중에서도 그가 잠시 머물렀던 장소인 헤이그의 풍경을 표현했다.

그는 연필, 펜, 부분적으로는 백묵이나 흑연을 사용해서 대규모로 소묘 작품을 그렸다. 안톤 마우베가 1881년 말 고흐에게 수채화 기법을 알려준 이후로 그는 불투명한 그림 물감으로 채색한 그림을 완성했다.


파리 시절에는 유화에 비해서 소묘가 뒷전으로 물러났다. 1887년 이후부터 빈센트는 다시 소묘를 점점 많이 그리게 되었다. 그 중에서 파리의 풍경을 채색한 소묘화도 있다.


그는 아를에서 자란 갈대를 재료로 삼아서 직접 만든 펜을 도구로서 높이 평가했다. 동시에 그는 새로운 표현 기술을 개발했다.

연필로 미리 그린 밑그림 위에 갈대펜을 사용해서 아주 다양한 선, 점, 곡선, 나선으로 소재가 표현되었다.


이 시기에 그려진 그의 소묘 중에서 많은 작품이 유화와 연관되어 있다.

소묘는 유화를 준비하기 위해서 이용되었거나, 아니면 고흐가 나중에 그려진 그림의 소재를 소묘로 다시 완성하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 소묘 작품은 삼자에게 그림에 대한 인상을 주거나 회화로 그려진 작품에서 그가 본 특정한 실수를 교정하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이었다.


고흐의 마지막 작품은 〈나무 뿌리〉이다. 미완성의 작품으로, 현재 반 고흐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이다.
고흐의 그림에서 자연이 큰 비중을 차지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고흐가 화가가 된 방법은 순전히 자신이 존경하던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그것을 묘사하면서 기교를 익혀나가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이런 방식은 다른 화가들에 비해서 그 발전 속도가 느려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 덕분에 고흐는 독특한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 수 있었다.


우여곡절들이 있던 가운데 고흐는 이때까지의 작업들을 총결산하는 의미의 대작을 구상하게 된다. 대작의 실마리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는데 1885년 3월의 어느 날에 고흐는 호르트라는 농부의 집을 지나치다가 그 집에 들어갔다.

그때 호르트의 가족들은 석유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었다. 고흐는 이 광경을 그림으로 그리기로 결심한다.

이런 와중에 3월 26일, 고흐의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에 나타난 삼촌들이 고흐를 마구 쪼는 가운데 고흐는 그나마 테오의 위로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런 우울한 시점에 고흐는 하나의 정물화를 그렸는데 꽃병에 꽃을 꽂고 아버지의 파이프 담배와 담배쌈지를 놓은 정물화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도 누그러지지는 않은 듯하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1885년 11월, 서른 두 살의 고흐는 유럽의 주요 항구 도실 분주하고 활기 넘치던 안트베르펜에 도착한다. 이 곳은 17세기 바로크 화가를 대표하는 루벤스의 도시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고흐는 \'스테인성\', \'빨간 리본을 한 여자 노인의 초상화\', \'담배를 물고 있는 해골의 머리\' 등을 그렸다.

사실 그것보다는 그가 네덜란드나 파리의 광선이 너무 어둡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의 화풍이 변화함에 따라 밝은 광선의 남프랑스를 동경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동생이 결혼하면서 사회적으로는 거의 백수취급받는 시아주버니가 신혼집에 있는건 민폐이기 때문에 떠났다는 얘기도 있다.
또 고흐와 테오는 불화라곤 없이 사이가 좋았을 것 같지만 의외로 이때 테오집에 얹혀 살면서 밤마다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테오를 붙잡고 미술 얘기를 떠들어대는 통에 테오에게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건 평생 가치관이 맞는 진정한 화가 친구를 갈망하던 고흐가, 테오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는 예술적 가능성을 보고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해석 또한 있다.


테오를 보고 \'너의 길은 화상이 아닌 예술가이다\'라고 권유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생레미 시절에 고흐의 후기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들이 여러 개 나왔다.


유명한 "별이 빛나는 밤"이라든지 사이프러스 나무를 소재로 한 작품 등이 그것들이다. 별이 빛나는 밤의 경우는 미국의 시인 휘트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시기 그림들에서 일부 연구자들은 고흐의 죽음에 대한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별과 사이프러스 나무인데, 사이프러스 나무는 서양에서는 한번 자르면 다시는 뿌리가 나지 않는 탓에 죽음을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졌다.


아를 시절에 강렬한 색채의 해바라기를 그린 것과는 상반된 태도라는 지적이다. 또한 별은 영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죽음을 은유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살아생전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고독하게 죽은 듯한 느낌이 강한 고흐의 이미지와 다르게
그는 이 시기에 슬슬 몇몇 전시회에 그의 그림이 초청받고 호평 받으며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생애에서 유일하게 그림이 팔린 시기도 이때. 오히려 그는 거기에 신경쓰기보다는 화가로서 훌륭한 작품을 남기는 데 더 집중했다고 하는데,


건강악화로 인해 우울증이 온 건지 이때까지의 그의 그림에 스스로 혹평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림이 생각대로 안 그려지는 것에 대한 비관도 심했다고 한다.
또한 화가가 된 지 10년 가까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그가 테오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생각도.


또한 그의 주기적인 발작에 대한 불안감을 엿볼 수 있는데 \'만일 내게 정말 심각한 발작이 일어나서 그림을 아예 못 그리게 되면 어쩌지?\' 하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동생 테오에게 가뜩이나 경제적인 부담을 주고 있는데 잘못하면 아예 거동이 안되는 반신불수 상태까지 갈 수도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정신적 부담이었을 것이다.


오베르는 파리에서 가까운 편이면서도 밀밭과 자연 풍광이 좋은 시골 마을이라 이미 여러 유명한 화가들이 오베르에 가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고흐가 존경하는 화가 중 한 명이었던 도비니도 오베르에 화실을 두고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또한 화가들과 교분을 나누던 의사 폴 가셰가 있었기 때문에 가셰라면 고흐를 이해해주고 병의 치료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게 피사로의 판단이었다.


결국 피사로의 충고를 받아들인 테오는 1890년 5월에 생레미의 요양원을 퇴원한 고흐를 오베르로 보내게 된다.

가셰 박사는 의사고시에 합격한 후 여러 정신병원을 돌며 근무하다가 우울증에 관한 박사논문을 쓴 후 파리에서 개인병원을 개업한 상태였다,


실천적 사회주의자로서 파리의 빈곤층 전문 병원에서 무료봉사를 했고, 예술가 카페에 종종 드나들면서 그들과 교분을 가졌다. 폴 세잔, 에두아르 마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 등이다.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결국 쇠약해진 몸과 정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프랑스제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갔으며, 즉사하지 않고 총알이 가슴을 관통해 척추에 걸려 손상을 입은 채 피투성이로 무려 거리가 1.6km에 달하던 Auberge Ravoux 여관으로 와서 쓰러졌는데, 여관 사람들이 두 명의 의사를 데려왔고 총알을 빼낼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테오가 고흐를 찾아왔으며, 고흐는 자신의 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의식도 있었고 스스로 담배를 피울 정도로 상태가 좋았지만


곧 고흐는 총알에 의한 감염으로 고통스러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틀 후인 1890년 7월 29일에 숨을 거두었다.
너무 비참하게 맞이한 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테오 마저 정신병이 생겨서 형이 죽은 지 6개월 후인 1891년 2월 25일 서른 넷의 나이로 형의 길을 따라갔다.


형처럼 직접적인 자살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자살이나 다름이 없는 죽음이었고 형제는 나란히 곁에 묻혔다.


생전 단 한 작품만이 판매됐는데 1890년에 \'아를의 붉은 포도밭\'을 안나 보흐라는 인물이 400프랑에 구입했다. 평론가가 전시회에서 고흐의 그림을 보고 평론한 글이 하나 남아있다.


반 고흐는 색의 명암이나 색조의 정확성에 그리 연연하지 않고 붓을 격렬하게 놀려서 거대한 풍경을 그렸다
사후 15년인 1905년 스데델리크 뮤지엄에서 무려 484점의 작품을 전시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유럽 전역에서 평론가들이 찾아왔고 고흐는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이 회고전 다음에 작품 가격이 2, 3배 올랐다고 한다.

1914년 빈센트와 테오의 무덤을 합장하며 두 사람의 형제애와 예술에 관한 열정을 알렸다.


요한나는 고흐의 그림을 알리기 위해 고흐가 남긴 편지를 정리해 책으로 출간했다.


663통의 편지 대부분 날짜가 없었기 때문에 요한나는 엄청난 시간을 들여 당시 일을 떠올리고 상황을 짐작하면서 순서를 정리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일반적으로 렘브란트 다음으로 가장 위대하고 후기 인상파 중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작품의 두드러진 색채, 힘찬 붓놀림, 그리고 왜곡된 형태는 현대 미술에서의 표현주의의 흐름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반 고흐의 예술은 그의 죽음 이후 놀라울 정도로 인기를 끌게 되었고, 특히 20세기 후반에는 그의 작품이 전 세계 경매에서 기록적인 금액으로 팔렸으며 순회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반 고흐는 전형적인 고통을 겪은 예술가로서 대중적인 상상력으로 신화화되었다.



예술과 창조에 대한 빈센트 반고흐 명언-



Great things are done by a series of small things brought together.

위대한 일은 작은 일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What would life be if we had no courage to attempt anything?

우리가 무엇인가를 시도할 용기가 없다면, 삶이 어떠하겠는가?

I am seeking, I am striving, I am in it with all my heart.

나는 찾고 있고, 노력하고 있으며, 온 마음을 다해 그것에 몰두하고 있다.


If you hear a voice within you say ‘you cannot  paint,’ then by all means  paint, and that voice will be silenced.

내면의 목소리가 “넌 그림을 그릴 수 없어”라고 말한다면, 반드시 그림을 그려라. 그러면 그 목소리는 사라질 것이다.


Painting is a faith, and it imposes the duty to disregard public opinion.

그림 그리기는 믿음이며, 대중의 의견을 무시할 의무를 부여한다.


There is nothing more truly artistic than to love people.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예술적인 것은 없다.


Normality is a paved road: It’s comfortable to walk, but no flowers grow on it.

평범함은 포장된 길과 같다. 걷기는 편하지만, 그 길에는 꽃이 자라지 않는다.


What is done in love is done well.

사랑으로 이루어진 일은 잘 이루어진 것이다.


I put my heart and my soul into my work, and have lost my mind in the process.

나는 내 작품에 나의 마음과 영혼을 담았고, 그 과정에서 정신을 잃었다.


The more I think about it, the more I realize there is nothing more artistic than to love others.

생각할수록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예술적인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I dream of painting, and then I paint my dream.

나는 그림을 꿈꾸고, 그런 다음 내 꿈을 그린다.


If you truly love nature, you will find beauty everywhere.

자연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어디에서나 아름다움을 발견할 것이다.


How wonderful yellow is. It stands for the sun.

노란색은 얼마나 멋진가. 그것은 태양을 상징한다.


For my part I know nothing with any certainty, but the sight of the stars makes me dream.

나는 확실히 아는 것이 하나도 없지만, 별을 바라보면 꿈을 꾸게 된다.


I feel that there is nothing more truly artistic than to love people and nature.

사람들과 자연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진정으로 예술적인 것은 없다고 느낀다.




[  타   문헌   문서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