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마당극 구경하기





























판소리 마당극
판소리가 하나의 민속음악으로서의 내용과 형식을 갖추고 완성의 단계에 이른 시기는 대체로 조선왕조 숙종 조로부터 영조 조까지의 시기라 생각된다.
또한 판소리의 전성시기는 대개 정조 조로부터 철종 연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즉 18세기 말경에서 19세기 초까지가 그 황금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 저 유명한 판소리 작가이며 이론가인 신재효와 8명창(八名唱) 등이 배출(輩出)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판소리는 민속연희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기록이 없고 향반들의 방증(傍證)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판소리의 창자(唱者)는 광대이므로 광대의 사회적 신분부터 밝혀야 할 것이다. 광대는 일명 화랑(花郞)·재인(才人)이라고 하여 중세기의 연예를 맡았던 우인(優人)이다.
그들은 소위 사니 계급에 속하는 일종의 천민이며, 무속의 담당자인 무당의 남편이었다.
그들은 호적에 우인(優人)이라 표기되며, 대기 군아(郡衙)의 재인청(才人廳)에 소속되고 있었다. 그들은 무계라는 그들 계급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은 전국적인 조직이었다.
군아에서 잔치를 할 때는 재인(才人)으로 봉사케 하고 군수가 나들이 할 때는 그들에게 고취(鼓吹)를 잡히어 악기를 연주케 하고 1년에 한 군에서 몇 명씩 악공으로 서울에 올라가 한두 달 연습을 하고 궁중의 나례(儺禮)를 치르게 하였다. 또 명이나 청국의 사신이 오면 산대잡희를 이들로 하여금 연출하게 하였다.
주로 판소리는 전승된 지역에 따라 가창 방식과 소리 놓는 법 등이 다르다.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 등은 판소리가 전승되는 지역에 따라 소리하는 방식이 각각 독특한 형태로 판소리가 명예와 부의 축적을 보증 하는 예술이 되면서 광대의 법통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먼저 동편제와 서편 제가 대립적으로 존재하였고 중고제가 생겨나게 되었다.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 등의 개념으로 나뉘는 것은 판소리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19세기 중엽 이후의 현상으로 파 악할 수 있다.
19세기에 이르면 판소리는 양반과 서민층이 함께 즐기는 민족 예술 형 태로 발달하게 되었고,
판소리의 성격이 양반층과 서민층을 아우르게 되면서 유파가 형성되었고 유파별로 기법과 미의식에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동편제의 특징은 웅장하고 씩씩하며 기교를 부리지 않아 선천적인 음량을 소박하게 드 러내어 소리한다는 점이다.
아니리가 길게 발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발림도 별로 없으 므로 오직 목에서 내는 통성에만 의지하는 소리제다.
비기교적이고 건조한 연기로 일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예스럽고 소박하다는 것을 뜻한다.
서편제의 특징은 애원 처절하고 연미부화한 것으로, 계면조를 주로 써서 슬프고 원망스 러운 느낌을 처절하면서도 정교하고 화려하게 그려 낸다.
장단의 변화를 통해 뛰어난 기교를 보여준다.
중고제의 창법은 창을 할 때 비교적 낮은 음성에서 평평하게 시작하여 중간을 높이고 한계점에 이르렀을 때 음성을 낮추어 부르는 것으로서,
성량이 풍부한 사람이 불러야 제격인 높은 수준의 기교를 요구한다.
독서풍의 가류로서 노래 곡조가 단조롭고 소박하 다.
판소리가 누구에 의해서 언제 불리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 뿐이다. 《조선창극사》에는 1930년대의 여러 명창들이 증언한 것을 토대로 하여, 판소리는 숙종 말에서 영조 초에 걸쳐 하한담과 결성(結成)의 최선달(崔先達)에 의하여 시창(始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의 행적에 대하여는 묘연하다. <목천읍지(木川邑誌)>에 우인의 이름으로 하한돌(河漢乭)이 <효행(孝行)편>에 나오고 결성에 해주최씨가 살고 있으나 그곳에서도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문헌상으로는 우춘대(禹春大) 다음에 권삼득이 나오는데 이 권삼득은 생원(生員)이라고도 하며 전북 완주군(完州郡) 안동 권씨(安東權氏) 향반(鄕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문중의 족보에 의하면 영조 47년(1771)생으로 되어 있다.
판소리의 전성기 정조대부터 고종대까지라 할 수 있다. 이 당시의 기록으로는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가 전해지고 있다.
당시 활약하던 광대는 우춘대(禹春大)이고 권삼득과 모흥갑은 당시 젊은 가객(歌客)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에 소위 열두 마당이 이미 정립되어 있었고
순조 26년에 이루어진 신자하(申紫霞)의 <관극시(觀劇詩)>에는 고·송·염·모(高素寬·宋興祿·廉啓達·牟興甲)의 명창 외에 김종운(金鍾運)의 존재를 밝혀주고 있다.
이 당시의 고문서론 순조 25년의 <갑신완문(甲申完文)>과 순조 27년의 <정해소지(丁亥訴志)>가 있어
당시의 창자들의 이름과 무계를 조직하고 있는 상황으로 재인(才人)들이 각 도에서 서울로 올라가 칙행(勅行), 즉 청국 사신이 올 때에 잡희(雜戱)를 연출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광대가 나례산주(儺禮山主)로서 판소리를 하는 동시에 나라에서 요구하는 잡희(雜戱)에 동원되어 외국사신 접대에 배우노릇을 하였다는 사실을 명시해 주고 있다.
판소리 란 광대가 한 손에 합죽선을 멋있게 들고 온갖 너름새를 곱게 섞어가면서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소리로써 보는 이에게 연극적 효과를 전달하는 한국 특유의 예술형태 중 하나이다.
연극이 상연되자면 각본이 있어야 하고 그 각본은 원전희곡(原典戱曲)이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이 판소리도 광대에 의하여 소리가 되려면
그 이전에 판소리 사설(辭說) 있어야 하며, 이 판소리 사설을 기록한 문서를 판소리 창본(唱本) 이라 한다. 즉 판소리에 있어서 창본은 연극에서의 희곡과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다.
창본은 크게 무명(無名)의 창본과 유명(有名)의 창본으로 나뉜다.
완판본 (完板本)인 <별춘향가> <열녀춘향수절가>, 세창서관본(世昌書館本)인 <원본 별주부전> 등등은 누구의 창본인지 알 수 없는,
무명의 창본들이며, 신재효(申在孝) 창본인 <판소리 여섯마당> <방만춘(方萬春)창본> <송만갑(宋萬甲)창본> 등은 주인이 뚜렷한, 즉 유명창본(有名唱本)들이다.
구전에 의한 것이 누구누구의 창본이라 하여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사본 또는 전사본(轉寫本)의 창본이 몇 개 있으며,
유진한(柳振漢)의 <만화문집(晩華文集)>에도 그것이 누구의 창본이라고는 밝히지 않은 채 <춘향가>가 실려 있다.
판소리에는 열두 소리가 있는데 이를 열두 마당이라고도 한다.
1810년경 간행된 송만재(宋晩載)의 <관우희(觀優戱)> 본사가(本事歌) 대목을 보면,
판소리의 열두 마당을 <춘향가(春香歌)> <화용도타령(華容道打令)> <박타령> <강릉매화타령(江陵梅花打令)> <변강쇠타령> <왈자타령(曰字打令)> <심청가(沈淸歌)> <배비장타령(裵裨將打令)> <옹고집타령(甕固執打令)> <가짜신선타령> <토끼타령> <장끼타령> 등이라 기록하고 있다.
현재 판소리 열두 마당 가운데 <춘향가> <심청가> <화용도(적벽가)> <박타령(흥부가)> 등은 실제로 불리고 있는 것들이며,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장끼타령> <옹고집타령> 등은 사설(唱本)만 전해오고 있을 뿐 실제로 불리지는 않는 것들이다
. <강릉매화타령> <왈자타령(무숙이타령)>은 창본도 전해지지 않고 물론 불리지도 않는 것들이다.
그 중 <숙영낭자전>은 근세의 명창 정정렬(丁貞烈)제가 불리고 있는데 이것이 정정렬 작곡의 것이라 전해지고 있으므로 이것과 철종·고종 시의 명창 전해종(全海宗)의 <숙영낭자전>의 가락과 사설의 전승 관계는 애매한 바가 있다.
변강쇠 타령, 옹고집 타령, 배비장 타령, 강릉 매화 타령, 장끼 타령, 무숙이 타령, 가짜 신선 타령 등 모두 일곱 작품이다.
이 작품들도 조선 후기에는 중요한 레퍼토리로 전승되고 있었으나, 주제가 대체로 민중적 세계관에 철저하다는 점 이다.
사설의 내용이 발랄한 민중 언어로 되었다는 점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전승이 끊겼다.
이들이 전승 과정에서 타락한 시기는 19세기 후반으로 알려지고 있다.
민중 기반 속에서 태어난 판소리는 19세기 들어 자체 변모와 발전을 통하여 다수의 양반을 청중으로 끌어들이기에 성공했으나,
이들의 적극적인 개입과 참여 속에서 상당한 변화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양반들의 감성과 미의식에 적합하지 않은 일곱 작품이 탈락하게 되었다.
이 일곱 작품은 내용에 있어서 세속적 욕망의 세계를 담고 있었으므로, 절제와 균형, 세련을 요구하는 양반층의 문화와는 어울릴 수 없었던 것이다.
변강쇠가는 조선후기 서민들과 천민들의 삶의 여러 모습을 흥미 있게 사실적으로 보여 주는 작품이다.
변강쇠가는 가루지기 타령 또는 횡부가라고도 한다. 시체를 ‘가로기지’하여 치상하는 정황을 그린 판소리라는 의미다.
뻣뻣하게 굳은 시체를 지게에 가로져서 내가는 것은 아주 가난한 천민들의 장례 풍속이라고 할 수 있다.
변강쇠가는 음란함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지만,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성’을 직접적 소재로 하여 인간사의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었다.
배비장 타령은 실전 판소리지만, 소설 『배비장전』을 통하여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도덕 군자인 체하는 배 비장이 제주도에 가서 애랑이라는 기생에게 반한다는 내용의 작품이다.
행실의 바름을 자랑하던 배 비장의 비속성이 드러나고, 형식에 치우쳐 공허한 유교적 도덕 관념을 통렬하게 풍자하면서 전체적으로 해학이 넘쳐흐르는 작품이다.
강릉 매화 타령은 타락한 인물인 골생원에 대한 풍자와 희화를 통하여 삶의 건전성과 균형 감각을 일깨우고자 한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각각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그 이야기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춘향가는 남원 부사의 아들 이몽룡과 기생의 딸 춘향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며, 신분 차이를 극복한 사랑과 절개를 강조합니다.
심청가는 효녀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300석에 몸을 팔아 인당수에 빠졌다가 다시 살아 돌아오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흥보가는 가난한 형제 흥보와 놀보의 이야기를 다루며, 형제간의 우애와 권선징악을 강조합니다.
수궁가는 토끼가 용왕의 유혹에 빠져 용궁에 갔다가 꾀를 내어 탈출하는 이야기를 다루며, 지혜와 용기를 강조합니다.
적벽가는 중국 삼국시대의 적벽대전을 소재로 하며, 유비, 관우, 장비 등 영웅들의 활약과 우정을 다룹니다.
유비, 관우, 장비가 삼고초려 끝에 제갈공명을 데려온 시점부터 이야기가 전개되며,
이후 조조가 강남을 평정하기 위해 백만 대군을 이끌고 남정길에 오르고, 제갈공명은 불과 수천 명의 군사로 하후돈이 이끄는 십만 대군을 크게 무찌르는 등의 전투가 벌어집니다.
중국의 소설인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크게 패하는 대목이 그 내용이며, 전쟁에 참여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그려내어 서민들의 삶과 정서, 주체성을 잘 녹여낸 것이 특징입니다.
판소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노래인 ‘창’과 말로 풀어내는 ‘아니리’로 들려주며, 긴 이야기를 노래하면서도 뛰어난 음악성과 연극적 요소를 갖추고 있습니다.
판소리에서는 이야기의 특징에 따라 다양한 장단과 조를 사용하여 감정을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급한 장면에서는 빠른 속도의 자진모리나 휘모리를 사용하고, 웅장하거나 매우 슬픈 장면에서는 진양조를 사용합니다.
이러한 판소리 다섯 마당은 우리나라의 전통문화 유산으로서 보존 및 계승되어야 할 소중한 자산입니다.
최근에는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새로운 판소리 작품들도 등장하고 있으며, 대중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판소리 열두 마당 중에 현재 불리는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를 판소리 다섯 마당이라 하여 열두 마당에서 독립시켜 부르기도 하는데, 이 다섯 마당에는 역대 명창들의 더늠 이 전해지고 있다.
<숙영낭자전>은 정정렬(丁貞烈), <장끼전>은 김연수(金演洙)가, <변강쇠전>은 박동진이 복원하여 불렀으나 열두 마당 시절의 가락을 전승한 것은 아니며 새로 편곡하여 부른 것이다.
판소리 다섯마당중에서도 흔히 불리는 대목들을 '눈대목이라 한다.
다섯마당의 눈대목은
<춘향가>:만첩청산(사랑가),쑥대머리,갈까부다등
<심청가>:범피중류(심청이 물 빠지는 대목),심봉사 눈뜨는대목,화초타령등
<흥보가>:가난타령,제비노정기,두손합장,화초장,박타는대목,구만리 장천등
<수궁가>:여봐라 주부야,화사자(화상 그리는 대목),고고천변,원해수변등 <적벽가>:새타령,화용도,장승타령,도원결의등 이다.
판소리에서 부르는 이의 음질(音質), 창법 및 가락형에 따라 무슨 목, 무슨 성하고 이름지어 부른다. 대개 목은 가락형과 창법에 관계가 깊고, 성은 음질과 관계가 깊다.
노랑목 가볍게 발성하고 가락에 물을 들인다 하여 여러 가지 장식적맛을 들이는 것으로, 육자배기와 같은 가락장식이나 창법을 쓰는 것을 말하는데, 명창들은 이를 꺼리고 있다.
외가집목 어느 조에서 그 조의 일반적인 구성음이 아닌 음이 쓰이거나 일시적인 변청이 되는 것을 말한다.
수리성 좀 껄껄하고 쉰 듯하여 설득력이 강한 명창의 음질. 송만갑, 정정렬이 수리성이었다.
쇠옥성 금이나 옥을 굴리는 듯 맑은 소리를 말한다
최종적으로 5마당만 남게 된 이유로는 판소리가 서민들의 애환을 대변해주는 내용들이 주를 이뤘을텐데
양반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양반들의 기호에 맞는 내용으로 변화됐을 것이라는 추정과 그 사설의 내용이 외설(猥褻)하고 황탄(荒誕)해 조잡한 내용을 가진 소리는 차차 안 부르게 됐다고 한다.
판소리는 우리 겨레의 전통예술 가운데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이며,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오른 판소리가 있습니다.
소리꾼이 고수 장단에 맞추어 창ㆍ아니리ㆍ발림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엮어가는 극적 음악이지요. 본래 열두 마당이었으나
지금은 <춘향가>ㆍ<심청가>ㆍ<수궁가>ㆍ<적벽가>ㆍ<흥보가> 다섯 마당만 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판소리가 우리의 대표적 전통예술로 자리 잡은 데에는 신재효(申在孝, 1812~1884)라는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신재효는 우선 판소리 열두마당 가운데 <춘향가>, <심청가>, <토별가(수궁가)>, <박타령(흥부가)>, <적벽가>, <변강쇠가> 등 모두 여섯마당의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면서 자기 나름으로 개작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판소리 이론을 정립하고 비평 활동도 했는데 특히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 판소리의 4대 법례로 제시하고 또 역대 명창들의 특색을 비유의 방식으로 평가했지요.
또 신재효는 집안에 ‘노래청’을 만든 다음 수많은 명창들과 교류하였고 김세종ㆍ정춘풍ㆍ진채선ㆍ허금파 같은 명창들을 길러냈다.
20세기가 지나면서 판소리는 다양한 형태로 바뀌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창극과 마당극이 있다.
마당극은 여러 배우와 다양한 악기가 등장해 일반 연극과 흡사하다고도 볼 수 있다.
계면조를 선호하게 되고, 동편제와 서편제의 유파간 경계가 무너졌으며, 여성 명창이 등장하였고, 장단 구조가 변용되었으며, 전조(길바꿈) 기법이 확대되었다.
20세기에 나타난 판소리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로 꼽히는 것은 판소리가 창극이라는 장르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앞으로 우리 민족 민요 가락
판소리 와 창극 마당극을 잘 보전 과
동시에 발전시켜 나가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 타 문헌 문서 참고 ]